독후감

안중근, 왜 죽음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는가?

곰돌이 baby bear 2010. 5. 30. 19:33

 당당한 모습

 

20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께서 순국하신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세월은 흘러 안중근 의사를 안과 의사냐고 물어보는 중학생도 있단다.

 

안중근은 황해도 아주 아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적당히 살았으면 자손만대 번창했을 텐데.. 

                                                                                                                 부인 김아려와 아들 분도와 준생

 

그런데 왜 모진 고생을 하며 조국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등박문을 총살하여 그로 인해 사형을 임하면서도

   3개월여 동안 혹심한 심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영하 20도 오르내리는 혹한에서도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쓰고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한 인간이 그렇게 당당히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을까?

우리 인간에게 목숨은 단 하나 뿐이요,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영원한 바램인데..

 

교과서에서만 안중근을 배웠지만, 그를 좀더 알아보고자

안중근 평전(김삼웅 지음, 시대의창)을 읽어 이를 알아보고 싶었다 

 

○교육과 됨됨이

집안 서당에 초빙된 스승에게서 각종 유교경전과 통감 등을 배우고 조선사와 만국 역사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했다.

한편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숙부와 사냥꾼을 따라 종종 산을 탔고 그 과정에서 사격술을 익혔다.

뒷날 대의를 위해 의병이 되고 '10.26의거'(이등방문 저격)를 감행한 것은 어릴 때부터 가졌던 무인적인 기질이 바탕이 되었다.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자 중근도 따라나서려 하자 "싸움판은 죽음터인데 어린 놈이 함부로 덤비는 거냐?"라는

꾸짖음에 "어른들이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적당을 토벌하는데, 자식된 저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겠습니까?"라며

총을 메고 싸울 때마다 앞장섰다.

 

○천주교 입교와 영향

1897년 1월 19세의 나이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매우 독실하였으며 일반 대중을 상대로 전교 연설을 할 정도에 까지 이르렀고,

일반 대중들의 교육수준이 저급하다는 것을 생생히 지켜본 안중근은 프랑스 신부에게 대학 설립을 간고히 요청하였으나

"한국인들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질 것이다"라 하여 거절하는 것을 보고 교의 진리를 믿을 지 언정

외국인의 마음을 믿지 않겠다

'사람이 의롭게 살지 않으면 유한한 삶은 부질없다' 것이 안중근의 삶과 신앙의 지표였다.

 

○의협심과 정의감으로 사회문제 해결

안씨 가문에 천주교를 전도하고 사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빌렘이 때로 신부로서 품위를 잃거나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에 분개한 안중근이 그 부당성을 제기하자 화가 난 빌렘은 안중근을 심하게 구타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물러서지 않고 사례를 일일이 들어 반박했고, 빌렘은 그제서야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안중근은 종교적 대행자라 할지라도 민족의식을 침해하는 경우 이를 단호히 배격하고 반드시 사과를 받아냈다.

 

1898년 3월 어느날 서울에서 동지 몇 사람과 산책을 하고 있는 데  말을 타고 가던 한국 사람을 한 일본인이 다짜고짜로 잡아당겨

말에서 떨어뜨리고 말을 빼앗아 가려 했다.

안중근은 큰소리로 질책하여 왼손으로 그자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권총을 꺼내어 그 자의 복부를 겨누었다.

주변의 일본사람들은 주위를 돌아볼 뿐 겁을 먹고 감히 역성을 들지 못했다.

 

○러일전쟁 결과로 일제의 야욕 인지

러일전쟁 전까지 특별하게 반일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같은 동양인인 일본의 승리를 바랬던 것 같았으나 

일본의 선전포고문에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으로,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으로부터 한국 지배권을 인정받는 등 침략 노골화로 일본의 야욕을 알게 되었음

외교에서 강자의 논리가 곧 법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됨 

 

○열정 - 학교 설립과 국채보상운동 참여

돈의학교-진남포에서 천주교 신자를 교육하던 학교의 교과과정에 교련과정을 포함시켜 구국영재교육기관으로 탈바꿈

삼흥학교 - 물려받은 가산을 정리하여 서양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중등수준의 야학교인 삼흥학교를 설립 운영

국채보상 참여 - 아내에게 장신구 등을 헌납케 하고 일반 민중들의 참여를 호소하며 국채보상회의 관서지부장을 맡았음

 

○사로잡은 왜군 포로 석방

러시아에서 연합의병부대 창설되었으며, 이때 안중근은 의병참모중장(義兵參謀中將)에 선임되었다

안중근이 참여해 처음으로 시작한 의병전투는 국내 진입작전이었다

안중근 부대는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삼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했다.

일부 전과를 올렸지만 무기와 병력면에서 쳐지고 악천후 속에서 4~5시간 전투로 의병부대는 거의 괴멸이었다.

 

이때 안중근 부대는 일본 군인과 상인 몇명을 포로로 잡았으나 훈계후 국제법에 따라 풀어주었다.

또한 무기없이 가면 처벌받는다고 애원하는 그들에게 무기도 돌려 주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의병들의 질타가 쏟아졌고 돌아간 포로들의 정보에 따라 일본군의 역습을 받는 등

인도주의와 국제법에 따른 결정으로, 안중근은 후에 엄청찬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국제법에 따라 안중근은 이등박문 저격 후 조선독립군 참모중장으로서 신분을 주장하였다 

 

 

위와 같이 안중근의 무인적 기질, 의협심, 정의감, 천주교의 영향, 목적에 대한 열정 등이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며, 형장에서도 "동양평화를 삼창하고 죽음을 맞고 싶다"라고 했던 안중근 의사께 한없는 존경을 드리며....

한편으론 조국이 독립되면 조국에 묻혀 달라는 유언과 안중군 의사의 후손들이 흩어져 어디에 사는 지도 모를 정도로 지켜주지 못한

   현재의 우리가 밉다.

마지막으로 독도를 지키고 한반도를 지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안중근 평정한번만 읽는다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1909년 3월 5일 11명과 조국독립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斷指同盟)

 김영배 동양평화론序                                                                                                     예술의전당 서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