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읽다가 창의성과 관련된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림 세 장을 놓고 그 사이에서 뜻을 끌어내보라는 둥
다른 사진으로 바꾸어 뜻을 만남들어 보는 것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다.
월리엄 더건(William Duggan)인 사람으로 전략적 직관(Strategic Intuition)을 강조하였고,
그의 책이 번역되엇는데 그 제목이'제7의 감각'이며 전략적 직관(戰略的 直觀)이 부제이다
책을 읽으면서 후회했다.
하필 이렇게 딱딱한 챇을 읽어야 하는가?
읽고 나서는 뜻 깊은 발견을 하였구나 생각하며 읽길 잘 했다고...
우리 뇌에는 경험을 담는 창고가 있다.
우리가 어떤 문제와 맞딱뜨리면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우리 뇌는 저장된 경험들을 떠올려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보면서 해결책을 찾아내려한다.
이러한 시도에서 순식간에 어떤 조합이 해결책이 되는데 이를 전략적 직관이라 한다.
전략적 직관은 상상력이 아닌 발견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발견하고 그 다음에 알게 된단다.
자기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을 모아서 새로운 조합을 통해 의미를 끌어낸다
아인쉬타인도 상대성 이론을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가져와 조합시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노력하면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하여 새것을 앎'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 등을 직간접으로 배워서(溫故), 문제와 관련된 경험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조합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발견한다(知新)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새로운 해결책을 발견하는 전략적 직관과 같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감이 오지 않으니 책에서 인용한 역사적 사실들을 소개하여 이해를 돋군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
천주교회에서 교회 재산관리 등 여러 분야에서 일을 하는 월급장이였는데, 여가 시간에 천문학에 몰두하게 되었고
쿠라크푸와 볼로냐의 대학에서 저명한 천문학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당시까지 천문학이 대단히 발전하였으나 학자들은 교회 달력에 절기의 정확한 날을 찾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난 1500여 년 동안 천문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천체의 항로를 알아내는 데 큰 진전을 이루었으나,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등 일곱 가지 행성은 예외였다.
165년경에 사망한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의 원을 배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인데,
예외적인 일곱 가지 행성의 항로를 추적할 수 없고 또한 예측할 수 없었다
문제는 교회력도 해와 달에 의존했기에 한 해의 특정한 날과 그것의 날짜를 정확하게 일치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당시 학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던 세 가지를 조합하여 태양계라는 성과를 이루었다.
첫째, 기원전 230년경에 죽은 그리스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처음 주장했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아이디어를 가져 왔다.
둘째,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이래로 천문학자들이 수집했던 천체 관찰 데이터를 이용했다
셋째, 당시 눈부시게 발전한 삼각함수를 적용했다
이렇게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달리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자신이 발명하지 않은 삼각함수를 처음으로 적용하였고
여기에 사용한 데이터 조차도 자신이 수집하지 않았던 것을 사용했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
툴롱은 프랑스 해군에서 가장 중요한 남부 해안의 항구였다.
영국군이 침공하여 차지해버려, 프랑스 혁명군은 도시를 에워싸고 반격을 준비한다
나폴레옹은 당시 스물네 살로 툴롱에 도착해 신고를 한다.
장군은 칼과 총검으로 탈환하려기에 포병대는 필요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포병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의 부임 신고를 받으며 묻는다.
"자네가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나폴레옹은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 보더니 먼 곳을 바라본다.
잠시 생각 후 에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으며 "레귀예트 요새가 점령되면 영국군은 툴롱을 포기할 겁니다"
이에 장군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폭소를 터뜨린다.
이후 장군은 칼과 총칼로 툴롱 요새를 습격하였으나 참담한 실패를 보았고, 해고됐다.
후임 장군은 나폴레옹 말대로 작은 요새 레귀예틀르 점령했고, 나폴레옹의 생각은 적중했다.
군사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성공적인 이끌어내기 위해 종합적인 요소들을 알고 있는데,
등고선 지도와 경량포, 미국의 독립전쟁, 쟌다르크였다 한다
첫 번째, 등고선 지도는 나폴레옹이 만든 것이 아니고, 나폴레옹 이전에는 전투시 등고선 지도를 이용한 사이 거의 없었다
툴롱의 등고선 지도에서 레귀예트라는 작은 요새를 발견했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요새였다
두 번째, 경량포 역시 나폴레옹이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에서 대략 10년 전에 만들어진 작은 포로 사람이나 가축이 아무데서나 굴릴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세 번째 요소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왔다
보스턴 포위 공격 때, 미국 군인인 헨리 녹스는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도체스터 하이츠' 위로 대포를 끌고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시내의 영국군들은 갑자기 자국 해군으로부터 고립될까봐 두려워서, 배를 타고 멀리 도망갔다
1776년 일어난 일이며, 1781년 요크타운 전투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네 번째 요소는 1429년 오를레앙 포위공격이다
잔다르크가 메인(main) 요새를 놓고 싸우는 대신,
도시 주위의 작은 요새들을 차지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국군으로부터 오를레앙 요새를 구했다
이렇게 나폴옹의 머릿속에 저장된 전투에 관한 정보들을 이용하여 툴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조합을 만들었다.
○추상화가 파블로 피카소
그의 예술은 대단히 독창적이고 다른 누구의 작품과도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고,
그래서 그의 내면에서 나온 것 처럼 보인다.
1901년과 1907년에 그린 두 점의 자화상 사이에 자신의 고유 스타일을 정립했다 하는데,
'망토를 입은 자화상'은 파란 배경에 검은 옷을 입고 수염 난 인물의 그림. 현실적인 사진처럼 보인다
나중에 그린 초상화는 그냥 '자화상'으로 유명한 피카소 스타일 그대로 왜곡된 형태와 비현실적인 색채들이 나타나고,
이 그림을 보자마자 피카소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1901년과 1907년에 무슨 일이?
1906년 내내 피카소는 리얼리즘과 인상파의 전통을 참조하여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앙리 마티스를 발견한다
1905년 여름 마티스는 처음으로 현대예술을 위한 위대한 돌파구를 마련하며 새로운 그림들은 파리 가을 전시회를 발칵 뒤집어 놓음.
특히 그의 첫 걸작품 '인생의 행복'은 1906년 봄 전시회에서 더 큰 파장을 일으킴
마티스의 새로운 스타일의 주요 특징은 왜곡된 형태, 비현실적인 색채, 명암법이나 원근법을 쓰지 않은 밋밋한 그림
또하나는 식민주의 전성기에 들여온 아프리카 조각상과의 만남이다
아프리카 조각들이 가지는 왜곡된 형태를 통해 위대한 미를 전달하는 방식에 감탄하다
피카소는 섬광 같은 통찰력을 얻었다
마티스가 그린 '인생의 행복'과 아프리카 조각상을 결합했다
결과적으로 획기적인 걸작이 탄생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피카소에서 마티스가 시도한 새로운 스타일의 핵심적인 요소들과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그림은 완전히 다른 맛이란다.
이 외에도 빌게이츠와 구글의 창업자 사례들이 있다
딱딱한 책이지만 읽을만한 책이다.
전략적 직관과 온고지신을 떠올리면서, 새로움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의 중요성르 실감하면서....
禪 지은이는 창의적이 되기위해 동양의 선/禪과 같이 냉철함, 모든 것을 깨끗이 지우는 자세를 강조
日新又日新 오늘 새로워지고 내일도 새로로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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