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제주의 여인 김만덕

곰돌이 baby bear 2010. 11. 3. 19:51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안대회 지음

 

이란 낱말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대중들의 시선들을 사로잡았던 각계의 스타들을 추적하였다.

 

가수, 구기口技연예인, 재담꾼, 책을 읽어주는 사람, 광대, 유랑 연예인, 사회사업가,

   노처녀 떡장수, 비구니, 무인, 기녀, 노비 시인, 서당 선생, 강도, 도욱, 조방꾼(기둥서방),

   점쟁이 등 도회지 공간에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사람들이 바로 이책의 주인공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당대의 명물名物로 제각각 그들 세계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꾼들이었다.

 

그 중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제주의 여인 / 사회사업가 김만덕 사례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서너 해 전 새로운 화폐 도안을 만들기 위해 논의가 진행되었을 때 제주도에서는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이라는 여성을 도안에 넣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함)

 

제주도 출신에다 기생 신분이라는 것과 장사를 통해 거부가 되고서

   재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한 의로운 행적, 즉 조선시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으로

   제주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되었기 때문이리라.

 

만덕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에 등장하고

   국왕 정족도 그녀를 칭송했으며, 정승을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이 그녀를 만나보고

   시와 산문을 써서 그녀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만덕의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진 계기는 제주의 흉년 때문이었다.

본래 제주도는 유난히 흉년에 취약한 지역으로,

   1792년 이래 계속 흉년과 태풍 피해로 수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다. 

1874년에는 바람과 해수로 인한 혹심한 피해를 입자

   제주목사는 9월 17일과 10월 23일 연달아 구휼미 2만 섬을 조정에 요청한 일이 있다.

 

그 뒤 올린 보고서에는 "올해의 흉년은 100여 년 만에 한 번 있을 정도의

   큰 재변"이라 할 만큼 참혹했다라고 적혀있다.

(제주도 토박이 사학자 변경붕은 10만 명에서 3만 명으로 인구가 줄었다고 할 만큼

    피해는 심각했다.)

 

적극적인 조처에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상황이 심각해지자,

   1795년 2월 조정에서는 5천 섬의 구휼미를 또 내려보냈으나,

   설상가상으로 쌀을 실은 배 열두 척 가운데 다섯 척이 난파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구휼미 求恤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을 돕는 데 쓰는 쌀) 

 

바로 그 시점에 만덕은 가산을 털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다가

   백성들을 구휼하는 자선( 正租 300석 또는 벼 100여 가마)을 베풀어,

   사람들은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조선시대 때 대체로 흉년에 의연금을 낸 사람들은 전임 관료로서 보상으로 벼슬자리를

   얻으려는 다른 목적이 있었고, 조정에서는 그 의중을 알면서도 상응하는 보상을 하여 주었다.

 

따라서, 만덕의 자선을 전해들은 정조 왕은 300석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라고 지시하였으나

   돌아온 대답은 아무런 목적없이 의연금을 냈다는 것이었다.

기생 명부에서 빼달라는 요구도 없었고... 

정말 사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만덕萬德은 왜 갑자기 기부를 했을까?

그녀의 설명

"사해四海가  모두 내 형제다.

  하물며 같은 섬사람 아닌가!

  게다가 재물이란 외물外物이다. 모이고 흩어지는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수전노가 되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뻣뻣하게 보기만 하고 구휼하지 않으랴!"였다.

 

정조가 제주목사에게 억지로라도 소원을 들어주려고 재촉하자,

   뜻하지 않는 답변이 돌아왔다.

 

"소첩의 몸은 비록 하나 저도 우리 임금님의 적자赤子입니다.

   (적자赤子 - 임금이 갓난아이처럼 여겨 사랑한다는 뜻으로, 그 나라의 ‘백성’을 이르던 말)

  적자로서 부모 같은 임금님의 얼굴을 보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중국 사람의 시에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고 싶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금강산의 절경은 천하에 알려져 있습니다.

  소첩이 요행히도 이 나라에 태어나 지금 쉰여덟으로 곧 늙어 죽을 것입니다.

  끝내 금강산을 보지 못한다면 중국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양 대궐의 웅장함을 구경하고 의장대의 멋진 모습을 보고서

  동쪽으로 일만이천봉을 오른 뒤에 고향에 돌아와 자랑한다면 소첩의 소원은 만족입니다."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 가다.

 

원래 제주도 여자는 바다를 건너 붙으로 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평민 여성이 대권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정조는 엉뚱한 소원을 듣고 편법을 써서라도 들어주라고 하명하여,

   내의원 소속 여의女醫의 우두머리(行首內醫女)라는 직책을 하사하는 방편을 써서

   각 고을의 역참에서 만덕을 호송케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한양에서 궁궐에 나아가 대왕대비혜경궁 홍씨를 두루 알현했고,

   고관대작들까지 만나고 싶어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감동한 정조가 당시 공무원 시험만덕의 전기를 쓰라는 시험문제를 낸 것은 예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녀의 출현이 얼마나 파란을 일으켰는 지

   한양에서는 만덕萬德이 겹눈동자의 소유자란 소문까지 널리 퍼졌다.

겹눈동자는 눈 하나에 눈동자가 두 개 들어있는 것으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순 임금과

   중국 대륙을 놓고 유방과 다툰 영웅 항우가 겹눈동자의 소유자였다.

박제가는 전생에 부처의 마음과 신선의 풍골이 있어서 만덕이 그런 용모를 지녔다고

   예찬하기 까지 했다.

 

소문이 크게 확산되자 명료하게 분석하기를 좋아하는 다산 정약용이 진위를 가리기 위해

   만덕을 집으로 불러 가까이서 그녀의 눈을 본 결과 흑백의 눈동자가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음

   확인하고 세태를 개탄했을 정도로 당시 한양에서는 일으킨 반향이 폭발적이었다.

 

 고인의 묘비 ( 제주시 모충사 )

행수내의녀김만복지묘 / 行首內醫女金萬福之墓

 

김萬德

부모를 일찍 여의고 기생으로 살았으나,

이름에서 보듯 많은 복을 나누어 준 여인.

아마 지금까지도 억복億福을 받고 계시겠지!

 

우리 주위에 물난리를 겪은 이웃들이 있어 더욱 가슴에 와닿습니다